저는 클라이밍 시작하고 한참 후에야 8자가 구형 장비라는 걸 알았습니다. 처음엔 선배가 하강할 때 쓰는 모습을 보고 "저거 나도 써볼까?" 했다가 사수가 단호하게 말렸어요. "8자는 하강 전용이고, 빌레이는 확보기로 해야 해"라고. 그때 이후로 8자는 특수 용도 외에는 쓰지 않습니다. 장비는 용도에 맞게 쓰는 게 안전의 기본입니다.

8자 하강기(피게이트)를 확보기로 쓰시는 분을 가끔 봅니다. 생긴 건 비슷하고 로프가 지나가는 구조도 있으니 같은 용도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이 둘은 용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혼용하면 위험합니다.
8자 하강기의 정체
8자 하강기는 이름 그대로 숫자 8 모양의 금속 디바이스입니다. 구식 확보/하강 장비 중 하나로 한때는 널리 사용됐어요. 지금은 주로 구조 활동이나 전문 로프 작업에서 쓰입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큰 고리와 작은 고리가 연결된 구조에서 로프를 S자로 통과시켜 마찰을 만듭니다. 8자 양쪽의 두 고리 크기 차이로 로프 방향이 꺾이면서 제동력이 생기는 방식이죠.
확보기와 다른 점
첫째. 제동력 차이
확보기는 빌레이(확보) 전용으로 설계되어 로프와의 마찰력이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8자는 주로 하강용이라 제동력이 상대적으로 낮아요.
빌레이에 8자를 쓰면 클라이머가 추락할 때 제동 손에 훨씬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 체중이 무거운 클라이머를 확보할 때 손이 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 로프 꼬임 문제
8자는 사용 중에 로프에 킨크(꼬임)를 유발하기 쉽습니다. 제 모양 때문에 로프가 S자로 휘어지면서 비틀림이 축적됩니다. 빌레이처럼 장시간 로프를 주고받는 상황에서 문제가 됩니다.
자주 8자를 쓰면 로프 수명이 줄어들어요.
셋째. 작동 메커니즘
확보기는 긴급 상황에서 로프를 잡기 쉽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튜브형은 V홈으로 꺾임을 이용하고, 그리그리는 자동 잠금까지 있죠.
8자는 그런 '빠른 제동' 메커니즘이 없습니다. 로프가 하강 중 자유롭게 흐르는 걸 기본으로 하고 제동 손 힘으로만 속도를 조절해요.
빌레이에 부적합한 결정적 이유
8자 하강기가 빌레이에 권장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현대 장비 규격과의 불일치입니다.
UIAA와 CE 인증 기준으로 '빌레이 디바이스'로 분류되려면 특정 제동 성능과 안전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8자는 이 기준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하강용으로만 인증받은 제품이 많아요.
즉 빌레이에 8자를 쓴다는 건 비인증 방식으로 확보한다는 의미입니다. 사고 시 법적 책임 문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8자가 적합한 상황
그럼 8자가 완전히 쓸모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용도가 있어요.
1. 구조 활동
구조대원이 위에서 내려갈 때 사용. 무거운 장비와 함께 하강하기에 적합.
2. 전문 로프 작업
산업 로프 액세스, 동굴 탐험 등. 8자의 단순 구조가 장시간 사용에 유리.
3. 래플링 전용
순수하게 하강만 하는 상황. 로프 꼬임이 문제되지 않는 짧은 하강에서 사용 가능.
4. 응급 백업
주 확보 장비를 잃어버렸을 때의 비상 대체. 다만 이 경우에도 일시적 사용만 권장.
확보기 구매가 어려울 때
"8자 밖에 없는데 확보해야 할 상황이면 어떻게 하나?"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정답은 '뮌터 히치'입니다. 잠금 카라비너 하나와 로프만 있으면 뮌터 히치로 확보가 가능합니다. 전통적인 확보 방식으로 UIAA도 인증하는 방법이에요.
8자보다 뮌터가 훨씬 안전합니다. 뮌터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뤄드리겠습니다.
역사적 관점
8자는 1970~80년대에 주요 확보/하강 장비였습니다. 당시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아서 빌레이에도 종종 썼어요. 하지만 1990년대 튜브형 확보기의 등장 이후 8자의 빌레이 사용은 비권장이 됐습니다.
나이 있는 클라이머가 "나는 8자로 빌레이한다"고 하시는 걸 종종 봅니다. 개인 선택이지만 요즘 기준에서는 권장되지 않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