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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영월 자연 암장에 다녀온 뒤 장비 가방을 그대로 베란다에 두고 한 달 가까이 잊고 지냈습니다. 다음 암장 갈 때 꺼내 보니 리버소 슬롯 안쪽에 고운 모래가 굳어 있었고, 로프를 통과시켜 보니 평소보다 확실히 뻑뻑했습니다. 초크 가루와 모래가 섞여 슬롯 표면에 얇게 눌러붙은 상태였습니다. 씻어내고 나서야 원래 느낌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확보기도 관리가 필요한 장비라는 것을 처음 실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확보기를 언제 어떻게 씻고, 어떻게 보관해야 오래 안전하게 쓸 수 있는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확보기가 더러워지면 생기는 문제
확보기는 단순한 금속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로프와 맞닿는 표면 상태가 제동력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슬롯에 초크 가루와 모래가 쌓이면 표면이 사포처럼 거칠어져 로프 외피를 빠르게 갉아먹습니다. 확보기가 아니라 로프가 먼저 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그리 같은 보조 제동 확보기는 문제가 더 직접적입니다. 캠 회전축 주변에 이물질이 끼면 캠이 뻑뻑하게 움직이거나 반대로 헐거워집니다. 여기서 캠이란 로프에 급격한 하중이 걸릴 때 회전하며 로프를 물어주는 내부 부품을 말합니다. 캠이 제때 돌지 않으면 잠금이 늦어지고, 그 차이가 추락 거리로 이어집니다.
바닷가 암장을 다녀온 뒤에는 염분이 남습니다. 알루미늄 합금은 녹이 잘 슬지 않는 편이지만 염분이 오래 남으면 표면이 하얗게 부식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리그리의 회전축이나 스프링처럼 재질이 다른 금속이 맞닿는 부분은 부식이 더 빠르게 진행됩니다.
세척이 필요한 신호
매번 씻을 필요는 없습니다. 실내 암장만 다닌다면 몇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아래 상황에서는 바로 세척하는 것이 좋습니다.
로프를 통과시킬 때 평소보다 뻑뻑하거나 서걱거리는 느낌이 날 때, 슬롯 안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렀을 때 가루가 묻어나올 때, 그리그리 캠을 손으로 돌렸을 때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을 때, 그리고 바닷가나 모래가 많은 자연 암장을 다녀왔을 때입니다. 비를 맞았다면 젖은 채로 두지 말고 그날 바로 씻고 말리는 것이 맞습니다.
세척 방법
준비물은 미지근한 물과 중성 세제, 부드러운 칫솔이면 됩니다.
먼저 미지근한 물에 중성 세제를 조금 풀고 확보기를 담급니다. 뜨거운 물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확보기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부품이나 고무 표시가 변형될 수 있고, 급격한 온도 변화는 금속에도 좋지 않습니다. 10분 정도 담가 굳은 이물질을 불립니다.
다음으로 칫솔로 슬롯 안쪽과 카라비너가 걸리는 고리 부분을 살살 문지릅니다. 철수세미나 연마제가 든 세제는 절대 쓰면 안 됩니다. 표면에 미세한 흠집이 생기면 오히려 로프 마모가 빨라집니다. 그리그리는 덮개를 열어 캠 주변과 회전축 틈새를 칫솔로 닦고, 캠을 여러 번 돌려가며 틈에 낀 가루를 빼냅니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물에 세제가 남지 않도록 충분히 헹굽니다. 세제 잔여물이 남으면 다음에 쓸 때 로프에 묻어납니다. 바닷가를 다녀온 경우에는 세제 없이 맑은 물에 한 번 더 헹궈 염분을 완전히 빼는 것이 좋습니다.
말리는 방법이 세척보다 중요합니다
씻는 것보다 말리는 과정에서 실수가 더 많이 나옵니다.
직사광선 아래나 난방 기구 옆에서 말리면 안 됩니다. 금속 자체는 괜찮지만 그리그리의 플라스틱 덮개나 손잡이가 변형될 수 있고, 급격하게 마르면서 부품 사이에 미세한 틈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풍이 되는 그늘에서 하루 정도 자연 건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리그리는 덮개를 연 상태로 세워서 말립니다. 캠 회전축 안쪽에 물이 고인 채 덮개를 닫으면 그 물이 며칠 동안 빠지지 않고 부식을 일으킵니다. 다 마른 뒤 캠을 돌려보고 물기가 튀지 않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습니다.
윤활제를 발라야 할까
가장 많이 헷갈리는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튜브형 확보기에는 윤활제가 필요 없습니다. 로프와 마찰로 제동하는 장비에 윤활제를 바르면 제동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그리의 캠 회전축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세척 후 캠 움직임이 뻑뻑하다면 회전축에만 아주 소량의 윤활제를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일반 기계용 그리스나 스프레이 윤활제는 피하고, 실리콘 계열이나 제조사가 권장하는 건식 윤활제를 씁니다. 기름 성분이 로프 접촉면으로 번지면 로프가 오염되고 제동력도 떨어집니다. 바른 뒤에는 마른 천으로 회전축 바깥쪽을 닦아 여분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확신이 없다면 바르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보관 환경
세척과 건조가 끝났으면 보관도 신경 써야 합니다.
첫째, 로프와 분리해서 보관합니다. 확보기의 금속 모서리가 로프 외피를 누르는 상태로 오래 두면 그 부분이 눌리거나 쓸립니다. 별도의 장비 주머니에 넣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화학 물질과 멀리 둡니다. 배터리액, 세정제, 휘발유 같은 물질은 알루미늄 합금을 약하게 만듭니다. 차 트렁크에 장비 가방을 두는 분들이 많은데, 트렁크는 여름철 온도가 매우 높아지고 각종 화학 물질이 함께 실리는 공간이라 장기 보관 장소로는 좋지 않습니다.
셋째, 습기를 피합니다. 베란다나 지하 창고처럼 습한 곳보다 실내 옷장이 낫습니다. 제 경우 장비 가방에 제습제를 하나 넣어두고 계절마다 교체합니다.
세척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태
세척은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이지 마모를 되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씻고 나서도 슬롯에 로프가 파고든 홈이 손톱으로 걸릴 정도라면 교체 시점입니다. 그리그리 캠이 세척 후에도 헐겁게 흔들리거나 회전축에 하얀 부식 자국이 깊게 남아 있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관리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교체를 검토하는 것이 맞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확보기는 얼마나 자주 씻어야 하나요?
정해진 주기는 없습니다. 실내 암장만 다닌다면 몇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하고, 자연 암장이나 바닷가를 다녀온 뒤, 비를 맞은 뒤, 로프 통과가 뻑뻑해졌을 때는 바로 씻는 것이 좋습니다. 주기보다 상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맞습니다.
식기세척기나 세탁기에 넣어도 되나요?
권하지 않습니다. 식기세척기는 고온과 강한 세제로 플라스틱 부품과 고무 표시를 변형시킬 수 있고, 세탁기는 확보기가 드럼 안에서 부딪히며 표면에 흠집을 냅니다. 미지근한 물에 담가 칫솔로 닦는 방법이 가장 안전합니다.
WD-40 같은 스프레이 윤활제를 써도 되나요?
튜브형 확보기에는 어떤 윤활제도 바르면 안 됩니다. 그리그리 회전축에 한해 소량을 쓸 수 있지만, WD-40 같은 석유계 스프레이는 넓게 번져 로프 접촉면까지 오염시키기 쉽습니다. 제조사가 권장하는 건식 윤활제나 실리콘 계열을 회전축에만 점 찍듯 바르고 여분은 닦아냅니다.
바닷가 암장에 다녀오면 당일에 꼭 씻어야 하나요?
가능하면 당일, 늦어도 다음 날 안에 맑은 물로 헹구는 것이 좋습니다. 염분은 마르면서 결정이 되어 틈새에 남고, 습기를 만나면 다시 부식을 일으킵니다. 특히 그리그리처럼 서로 다른 금속이 맞닿는 부품이 있는 확보기는 염분에 더 약합니다.
씻은 뒤 로프 통과가 여전히 뻑뻑하면 어떻게 하나요?
먼저 로프 쪽을 확인하세요. 로프 외피에 초크나 흙이 배어 있으면 확보기를 아무리 씻어도 뻑뻑합니다. 로프도 세척한 뒤에 다시 시험해 보고, 그래도 같다면 슬롯 표면의 마모나 변형을 의심해야 합니다. 이 경우 세척으로 해결되지 않으므로 교체를 검토합니다.
확보기 교체 시점은 어떻게 판단하나요?
슬롯에 로프가 파고든 홈이 손톱으로 걸릴 정도로 깊어졌을 때, 그리그리 캠이 세척 후에도 헐겁게 흔들릴 때, 회전축에 부식 자국이 깊게 남았을 때, 그리고 큰 추락 하중을 받은 뒤 외형이 조금이라도 변형되었을 때입니다. 제조사가 정한 사용 연한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확인하세요.
마무리
확보기 관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 암장이나 바닷가를 다녀온 뒤, 그리고 뻑뻑한 느낌이 들 때 미지근한 물과 칫솔로 씻고 그늘에서 완전히 말린 뒤 로프와 분리해 보관하면 됩니다. 윤활제는 그리그리 회전축에만, 그것도 소량만 씁니다. 몇 분 걸리지 않는 습관이지만 확보기와 로프 수명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다음 글에서는 확보기에 찍힌 CE, UIAA 같은 인증 마크가 무슨 뜻인지, 왜 미인증 제품을 피해야 하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