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그날 암장에 구급차가 왔습니다. 은평구의 한 실내 암장이었고, 확보를 보던 사람이 보조제동확보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장비가 고장 난 게 아니었습니다. 조작 방식이 제조사 권장과 달랐던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봤고, 이후 제 장비 선택 기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0년 가까이 실내외를 병행하며 수동과 자동을 모두 써온 지금도, 저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수동확보기를 씁니다. 그 이유를 정리해봅니다.
자동확보기가 아니라 보조제동확보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리그리 같은 장비를 자동확보기라고 부릅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통용되는 정식 명칭은 보조제동확보기입니다. 이 이름 차이가 단순한 용어 문제가 아닙니다.
내부 캠 뭉치가 로프를 눌러 제동을 보조하는 방식인데, 핵심은 '보조'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확보자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확보자를 돕는 장치라는 뜻입니다. 캠이 작동하려면 로프에 일정 이상의 하중이 걸려야 하고, 제동 손이 올바른 위치에서 로프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자동'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다 보면 이 전제 조건이 머릿속에서 사라집니다. 손을 놔도 알아서 잡아주는 장치라는 인식이 생기는 순간, 그 장비는 안전장치가 아니라 위험 요소가 됩니다. 저는 용어를 정확하게 쓰는 것만으로도 사고의 상당수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격한 사고, 그 이후 바뀐 것
사고 당시 확보자는 초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장비를 몇 달 이상 써온 사람이었고, 본인은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파지법이었습니다. 제조사가 명시한 방식이 아니라 본인이 편한 대로 굳어진 방식이었고, 추락 순간 그 차이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때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잘못된 습관은 사고가 나기 전까지 아무 신호도 주지 않는다는 것. 둘째, 그 습관은 편리한 장비를 쓸수록 더 빨리 굳는다는 것입니다. 장비가 실수를 덮어주는 동안에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 뒤로 저는 새 장비를 살 때마다 제조사 공식 가이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유튜브 영상이나 주변 사람의 설명으로 대체하지 않습니다. 국내 클라이밍 현장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조작법 중에는 제조사 권장과 다른 것이 섞여 있고, 그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추적하기가 어렵습니다.
수동으로 기본기를 먼저 익혀야 하는 이유
빌레이(belay)란 확보자가 로프를 조작해 등반자의 추락을 막거나 하강을 제어하는 행위 전반을 뜻합니다. 이 감각은 몸으로만 익힐 수 있습니다.
수동 튜브형 확보기는 제동력이 오로지 제동 손에서 나옵니다. 손의 위치와 각도, 쥐는 힘이 그대로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뭘 잘못했는지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로프가 미끄러지면 손이 잘못된 것이고, 제동이 걸리면 제대로 한 것입니다. 피드백이 즉각적이고 정직합니다.
반면 보조제동확보기로 시작하면 이 피드백 회로가 흐려집니다. 손 위치가 어중간해도 캠이 어느 정도 커버해주기 때문에, 내 조작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 상태로 몇 달이 지나면 잘못된 자세가 그대로 굳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야외나 멀티피치(multi-pitch) 환경에서 수동 장비를 써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감각이 없으면 그게 진짜 위험한 상황입니다.
저는 ATC 가이드(ATC Guide)로 시작했습니다. 오프 빌레이(off belay) 모드, 즉 확보자 없이 로프를 고정해두는 모드를 지원하는 튜브형 확보기인데, 멀티피치나 야외 암벽에서도 그대로 쓸 수 있어 범용성이 높습니다(출처: Black Diamond). 실내에서 기본기를 익히고 그대로 야외로 가져갈 수 있었다는 점이 결과적으로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자동을 안 쓰는 건 아닙니다
오해하실까 봐 덧붙이면, 저는 보조제동확보기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입문 후 1년쯤 지나 필요에 의해 추가로 구매했고, 지금은 DMM 피봇과 페츨 그리그리+, 네옥스를 상황에 맞게 구분해서 씁니다. 장시간 확보를 봐야 하는 프로젝팅 상황이나 체중 차이가 큰 파트너와 등반할 때는 보조제동 방식이 확실히 유리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순서입니다. 기본기가 몸에 밴 상태에서 편리한 장비를 더하는 것과, 기본기 없이 편리한 장비부터 시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이고, 후자는 의존이 생기는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비가 발전할수록 사용자가 알아야 할 것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납니다. 캠이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고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지 않는지, 그건 튜브형에서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던 문제입니다.
참고로 로프 직경 호환 범위나 CE·UIAA 인증 확인 같은 첫 구매 시 체크해야 할 항목들은 첫 확보기 고르는 법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어떤 확보기를 살지 고민 중이시라면 그쪽을 먼저 보시는 것이 순서에 맞습니다. 이 글은 어떤 장비를 사느냐보다 어떤 순서로 익히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보조제동확보기와 자동확보기, 어느 쪽이 맞는 표현인가요?
A. 국내에서 통용되는 정식 명칭은 보조제동확보기입니다. 자동확보기라는 표현은 널리 쓰이지만 오해를 부르기 쉽습니다. 캠이 제동을 보조할 뿐 확보자를 대신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용어를 정확하게 쓰는 것만으로도 장비에 대한 과신을 줄일 수 있습니다.
Q. 수동확보기가 자동보다 위험한 것 아닌가요?
A. 장비 자체의 위험도보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더 결정적입니다. 수동은 제동력이 전적으로 손에서 나오기 때문에 잘못된 조작이 즉시 드러나고, 그래서 오히려 배우기에 적합합니다. 반대로 보조제동 방식은 잘못된 습관이 가려진 채로 굳을 수 있다는 점이 위험 요소입니다.
Q. 수동으로 얼마나 연습해야 자동으로 넘어갈 수 있나요?
A. 정해진 기간은 없습니다. 제동 손의 위치와 힘 조절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오는 시점이 기준입니다. 저는 1년 정도 지나 필요를 느꼈을 때 추가했는데, 사람마다 등반 빈도가 달라 기간보다는 감각이 몸에 밴 정도로 판단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Q. 이미 그리그리로 시작했는데 지금이라도 수동을 배워야 하나요?
A. 야외나 멀티피치로 확장할 계획이 있다면 배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급하게 전환할 필요는 없지만, 낮은 루트에서 튜브형으로 확보를 서보면서 제동 손 감각을 따로 익혀두면 나중에 선택지가 넓어집니다.
Q. 암장에서 보조제동확보기만 쓰라고 하는 곳도 있던데요?
A. 시설 운영 방침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만 그런 환경이라도 제조사 권장 파지법을 정확히 익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장비 종류를 제한하는 것과 올바른 조작법을 익히는 것은 서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결론
확보기는 사람의 목숨을 직접 좌우하는 장비입니다. 수동이든 보조제동이든 설계 자체는 충분히 잘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사용자 쪽에 있습니다. 그날 구급차를 부른 것도 장비 결함이 아니라 굳어진 습관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하신다면 수동으로 제동 손 감각을 먼저 익히시길 권합니다. 그다음에 필요를 느낄 때 보조제동 장비를 더하면 됩니다. 순서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훨씬 넓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습니다.
※ 관련글 : 첫 확보기 고르는 법, 튜브형이냐 그리그리냐 고민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