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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보 지점 바로 아래에서 추락했는데 빌레이어 머리 위 1미터까지 떨어졌습니다. 로프도 느슨하지 않았고, 캠도 누르지 않았는데 그리그리가 잠기지 않은 겁니다. 처음 그 영상을 봤을 때 솔직히 몸이 굳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에서 빌레이를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로프 마찰이 그리그리를 무력화시킨다
클라이밍에서 추락이 발생하면 로프에 충격이 실리고, 그 힘이 빌레이 장치에 전달되면서 잠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원리가 생각보다 쉽게 깨집니다.
문제는 로프 마찰(rope drag)입니다. 여기서 로프 마찰이란, 로프가 퀵드로와 바위 모서리를 여러 번 꺾으며 지나갈 때 발생하는 저항을 말합니다. 루트가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형태라면 마찰은 상당히 커집니다. 클라이머가 추락해도 그 충격의 상당 부분이 마찰에 흡수되어 빌레이 장치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거죠.
제가 직접 오버행 루트에서 빌레이를 서봤을 때도 이 차이를 느꼈습니다. 클라이머가 추락하는 순간 제 손에 오는 당김이 예상보다 훨씬 약했거든요. 그때는 그냥 '소프트 캐치가 됐나보다' 하고 넘겼는데, 돌이켜보면 마찰 손실이 상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서도 루트가 오버행에 턱이 있는 구조였고, 로프가 여러 볼트를 거치며 마찰이 크게 쌓였습니다. 결국 빌레이어에게 전달된 힘이 그리그리를 잠그기에 충분하지 않았던 겁니다. 마찰이 안전장치를 사실상 무력화한 셈입니다.
빌레이 자세와 로프 입사각의 관계
그리그리가 잠기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제동 측 로프를 확실히 잡고 있어야 하고, 클라이머 쪽 로프의 입사각(로프가 장치로 들어오는 각도)이 적절해야 합니다.
입사각(entry angle)이란 로프가 그리그리로 들어오는 방향과 장치 사이의 각도를 말합니다. 이 각도가 완만할수록 로프가 장치를 쉽게 통과하고, 반대로 가파를수록 잠금이 잘 됩니다. 빌레이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이 각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빌레이어가 클라이머를 보기 위해 첫 번째 볼트 바로 아래에 서 있었고, 오버행 루트 탓에 클라이머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위치에서는 클라이머 쪽 로프가 빌레이어 앞이 아니라 위로 향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리그리 내부 캠이 제대로 눌리지 않아 잠금 효율이 크게 떨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은 클라이밍을 좀 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그리를 쓰면 손을 놔도 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서, 자세나 위치보다는 장비 자체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이 사고 사례를 보기 전까지 입사각을 그렇게 의식하며 빌레이를 선 적이 없었습니다.
출처: Petzl 공식 사이트에서는 그리그리 사용 시 빌레이어가 클라이머와 같은 방향으로 서야 하며, 제동 측 로프를 항상 손으로 잡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사용 자세가 틀리면 의미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9.0mm 로프가 변수가 된 이유
이번 사고에는 세 번째 변수가 있었습니다. 사용한 로프가 9.0mm짜리였고, 상태가 좋아 표면이 매우 매끄러웠습니다.
페츨(Petzl)은 그리그리에 사용 가능한 로프 직경을 8.9mm에서 10.5mm 사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출처: Petzl 공식 사이트). 9.0mm는 이 범위 안에 있으니 규격 위반은 아닙니다. 하지만 범위 하단에 가까울수록 로프와 장치 내벽 사이의 접촉 면적이 줄어들고, 마찰력도 작아집니다.
여기서 로프 직경(rope diameter)이란 로프의 단면 굵기를 말하며, 숫자가 클수록 굵고 무겁지만 빌레이 장치 내에서 더 잘 잡힙니다. 반대로 얇을수록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장치를 통과하기 쉽게 만드는 겁니다.
게다가 새 로프에 가까운 상태라 표면 코팅이 살아 있어 더 매끄러웠습니다. 보풀이 없다는 건 그만큼 마찰을 줄여줍니다. 평소에는 장점인 요소들이 이 상황에서는 전부 불리하게 작용한 겁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아찔했던 건, 이 조합이 사실 꽤 흔한 세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가벼운 로프를 선호하는 클라이머라면 누구나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 페츨 그리그리 권장 로프 직경: 8.9mm ~ 10.5mm
- 직경이 하한에 가까울수록 장치 내 마찰력 감소
- 새 로프일수록 표면이 매끄러워 미끄러짐 위험 증가
- 얇고 매끄러운 로프 + 마찰 손실 + 잘못된 자세 = 복합 위험
안전 수칙, 이미 알지만 지키지 않는 게 문제다
이 사고에서 제가 가장 무겁게 받아들인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사고를 낸 빌레이어가 초보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경험이 있었고, 그리그리도 익숙하게 써왔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익숙함이 문제였습니다.
익숙해지면 제동 측 로프(brake-side rope)를 느슨하게 잡게 됩니다. 여기서 제동 측 로프란 그리그리 아래로 나오는 로프, 즉 빌레이어가 손으로 쥐어야 하는 쪽을 말합니다. 이 손의 힘이 빠지면 클라이머가 추락했을 때 장치가 잠기더라도 로프가 순간적으로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클라이머가 보이지 않으면 더 방심하게 됩니다. 오버행 구간에서 빌레이어가 시야를 잃으면 추락 타이밍을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몸이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게 되는 겁니다. 이번 사고에서도 빌레이어는 클라이머가 언제 떨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로프를 느슨하게 잡고 있었습니다.
저도 제 빌레이 습관을 돌아봤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그리그리를 쓸 때 제동 측 로프를 얼마나 의식하며 잡고 있었나 생각해보니,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많은 클라이머들이 비슷할 겁니다. 그리그리가 자동으로 잡아준다는 믿음이 손의 힘을 빼게 만드는 거죠.
UIAA(국제산악연맹)는 모든 빌레이 장치 사용 시 제동 측 로프를 항상 손으로 잡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반자동 장치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반자동 빌레이 장치(semi-automatic belay device)란 추락 시 자동으로 잠기는 기능이 있는 장치를 말하는데, 그리그리가 대표적입니다. '반자동'이라는 이름이 '항상 잡아준다'는 오해를 낳는 것 같은데, 이번 사고가 그 오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그리그리는 손을 놔도 자동으로 잠기는 거 아닌가요?
A. 많은 분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그리는 추락 충격이 장치에 제대로 전달될 때만 잠깁니다. 로프 마찰로 충격이 약해지거나 입사각이 맞지 않으면 잠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동 측 로프는 항상 손으로 잡아야 합니다.
Q. 9mm 로프도 그리그리 권장 범위 안인데 왜 문제가 되나요?
A. 규격 내에 있다고 해서 성능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직경이 하한에 가까울수록, 표면이 매끄러울수록 장치 내 마찰력이 줄어듭니다. 이번 사고처럼 다른 불리한 조건이 겹치면 실질적인 위험이 됩니다. 로프 상태를 포함해 시스템 전체를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Q. 빌레이어 서는 위치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A.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빌레이어가 볼트 아래로 지나치게 들어가거나 클라이머와 각도가 어긋나면 로프의 입사각이 나빠져 그리그리 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특히 오버행 루트에서는 클라이머가 보이지 않더라도 첫 볼트 바깥쪽에 위치를 잡는 것이 안전합니다.
Q. 클라이머가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빌레이 해야 하나요?
A. 클라이머와 구두로 소통을 유지하면서 로프 상태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시야가 가리는 상황일수록 제동 측 로프를 더 의식적으로 잡고 있어야 합니다. 긴장이 풀리기 쉬운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집중해야 합니다.
결론
이번 사고가 무서운 이유는 원인 하나하나가 사실 대부분의 클라이밍 현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얇은 로프, 시야가 안 나오는 오버행 루트, 익숙해진 빌레이어의 느슨한 손. 특별히 잘못된 게 없어 보이는데 세 가지가 겹치자 치명적인 상황이 됐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복합적인 리스크는 한 번 인식하고 나면 훨씬 잘 보입니다. 다음에 빌레이를 설 때, 혹은 빌레이를 받을 때 파트너의 자세와 위치를 한 번씩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그리를 쓴다면 제동 측 로프를 잡고 있는지, 서 있는 위치가 적절한지, 로프 마찰이 과하게 걸리는 루트는 아닌지를 체크하는 습관이 사고를 막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